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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리뷰] 정유정, 28, 은행나무, 2013.

by 평범한 윤군이오 2015. 1. 26.



28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3-06-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9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2011 베스트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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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28, 은행나무, 2013.



7년의 밤으로 유명세를 탄 정유정 작가님의 장편소설 28에 대한 리뷰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을 읽을 때는 조심히.

'이씹팔'이 아닙니다. '이시팔'도 아니고, 부드럽게 표준 발음으로 '이십팔'이라고 읽어줍시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구입한 책인데, 책을 샀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지인 중 한 분이 '좀비?'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덕분에 이 책이 좀비 소설인 줄 알고 상당히 부담스럽게 읽었습니다.

(저는 좀비를 싫어합니다. 정확하게는 현대 미디어에서 다루는 굶주린 아귀 같은 좀비를 싫어합니다.)

 

이 소설은 출퇴근 전철 안에서 이틀만에 다 읽었습니다.

아마 시간으로는 넉넉잡아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네요.

거의 500쪽에 달하는 책이었는데, 3시간 만에 다 읽었다는 건, 그만큼 페이지가 잘 넘어갔다는 이야기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쉽고,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할 테니까, 아직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살포시 Ctrl+W나 Alt+F4를 눌러 이 페이지를 벗어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이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울 근교의 화양시.

어느 날, 정체 불명의 괴질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감염이 된 사람은 눈이 붉게 변하고 혈색이 거무튀튀해지며 발병 후 수 시간에서 삼 일 이내에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입니다.

일명 '빨간 눈'은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순식간에 29만이 살아가는 화양시를 집어 삼키고 말지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통 속에 죽어가지만, 빨간 눈의 원인과 해결책은 누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에볼라보다 빠른 전염 속도와 100%에 달하는 치사율.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에 놀란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화양을 봉쇄하고, 무법천지가 된 화양에서 생존을 위한 극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정유정 작가는 이 작품을 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된 소와 돼지를 보면서 구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인지 작품 속에서 '빨간 눈'이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화양시 내의 개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잔인한 그 묘사 속에서 구제역의 참상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은 분명 재미있는 소설인데, 몇몇 장면의 폭력성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정부가 포기한 도시에서는 군대의 무력이 힘이 되고, 군인들마저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공격적인 본성 뿐입니다.

대낮의 큰길에서 강도와 살인이 일어나고, 강간, 방화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됩니다. 거리에는 들짐승이 되어버린 굶주린 개들이  어슬렁거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을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인수공통전염병'과 '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아이디타로드(세계 최대 개썰마 경주)'에 참여했으나 씻을 수 없는 업보를 짊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수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재형', 재형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낸 후,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화양으로 들어온 기자 '윤주', '빨간 눈'의 발병을 최초로 확인한 119 대원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기준', 인간에게 학대 당하다 탈출한 늑대개 '링고', 럭키를 죽이고 재형과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이코 패스 '동해'. 이 다섯 인물은 서로 '복수'라는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링고'가 자신의 아내를 물어 죽였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재형이 아끼는 개이자 링고의 짝이었던 '스타'를 죽이고, 링고는 기준에게 복수의 어금니를 들이댑니다. 아버지 몰래 '럭키'를 때려 잡으려다 재형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군대에 끌려간 것에 앙심을 품은 동해는 아버지와 재형에게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만 노리지요.

 

인물들은 '복수'를 꿈꾸기 때문에 누구보다 잔인해지고, 누구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동해가 죽지 않은 것도, 수많은 죽음의 현장에 뛰어든 기준이 살아 남은 것도, 드림랜드가 전소했어도 술에 취했던 재형이 죽지 않은 것, 모든 것이 '복수'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빨간 눈'의 발병으로 시작된 사건은 주인공들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폭주하는 기관차마냥 치닫기 사작합니다.

손도끼를 든 인간과 개가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 뒹굴고, 아버지와 아들이 총과 화염병을 든 채 대치하며, 군대와 민간인이 살기 위해 충돌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한이 뒤엉키며 비명과 함께 피와 살점이 튀어 오르며 비극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빨간 눈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많은 이가 죽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처절한 세상에 버려지고 말지요.

 

정유정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지위와 생명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잔악무도함을 고발하는 것일까요,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인간 본성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책장을 닫았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장면들의 연속되면서 살아남기를 바랐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작가에 대한 분노도 일었습니다.

 

정유정 작가의 전작 [7년의 밤]에서 느꼈던 기분과도 비슷했습니다.

 

 

여튼, 글이 길어지니 산으로 가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라 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지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창궐하면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인간애를 통해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면 [28]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는 인물들에 천착합니다. 도덕적인 잣대는 필요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달리는 인물들의 처절한 사투를 그릴 뿐이지요.

 

아마 이제 정유정 작가의 글은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자극적인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맛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이들 중에 비위가 약한 사람이 있다면 굳이 찾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도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추악함을 들춰보고 싶거나,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밤이 늦었네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일주일 맞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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